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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어렵게 느껴졌던 당신에게 —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김정아

 

솔직히 고백하자면,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은 늘 조금 멀게 느껴졌다. 「죄와 벌」,「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목은 알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책들. 너무 두껍고, 너무 무겁고, 어딘가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았다. 러시아 문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어딘가 주눅이 드는 느낌.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만나고 나서, 그 거리가 조금 좁혀졌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많이.

 

1. 번역가가 된 CEO의 새벽 이야기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는 패션 기업 스페이스눌의 CEO이자 러시아 문학 박사인 김정아가 쓴 에세이다. 그는 10년에 걸쳐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 「죄와 벌」,「백치」,「악령」,「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혼자 완역해 냈다. 총 6,763쪽. 숫자만으로도 압도되는 분량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시간이 어디서 났냐는 것이다. 저자는 낮에는 회사를 경영하고, 매일 새벽 2~3시에 눈을 떠 도스토옙스키와 마주 앉았다. IMF 외환위기 속 미국 유학시절, 두 아이를 키우고 강의 조교까지 병행하던 버거운 나날들 속에서도 그 새벽만큼은 놓지 않았다고 한다. 허리에 복대를, 목과 손목에 보호대를 차고 책상 앞에 앉아 번역을 이어간 날들도 있었다고 책은 전한다.

 

생존의 무게가 짓누르는 낮을, 고독하고 조용한 새벽의 문학으로 버텨낸 사람. 그 이야기가 책 전체에 잔잔하게 흐른다. 읽다 보면 저절로 묻게 된다. 나는 무언가를 그토록 오래, 그토록 조용히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2. "독자가 읽기 쉬운 게 좋은 번역이지"

 번역이라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외롭고, 훨씬 치열하다. 저자는 번역 철학을 세우는 과정에서 故 이어령 선생을 만났고, 그 한마디에서 방향을 찾았다고 한다.

"독자가 읽기 쉬운 게 좋은 번역이지."

쉽게 들리지만, 사실 이 말은 굉장한 결단을 요구한다. 문학적 상징도, 종교적 함의도, 심리적 미세함도 -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닿는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저자는 그것을 타협이 아닌 더 높은 층위의 선택이라 부른다.

 

난해함을 유지하는 번역이 아니라,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번역.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지금의 완역본이다. 그 말이 왠지 오래 마음에 남는다.

 

3. '도 선생을 사랑한 10 년'

 저자는 책 곳곳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단순한 애칭이 아니다. 그의 문장이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다는 고백이다. "제 인생의 90%는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었다"는 말처럼, 번역은 저자에게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를 내 언어로 옮기는 일, 그 자체가 삶이었다.

 

특히 4 대 장편 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번역하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곧 사랑이며, 연민이 없으면 비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 지옥은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대명제가 도스토옙스키가 후대에 남긴 유언처럼 담겨 있다는 사실을. 그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한 것 같다.

 

4. 도스토옙스키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열린 책

이 에세이의 가장 큰 미덕은, 도스토옙스키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따뜻하게 열려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를 '도 선생님'이라고 부를 만큼 인간적으로 깊이 아끼는데, 그 애정이 글 곳곳에 묻어 있다. 거창한 문학 해설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문장에 매혹되어 10년을 헌신한 이야기로 읽힌다.

 

책 말미에 저자는 이렇게 적는다. "이 책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도스토옙스키를 한번 읽어볼까?' 생각하게 된다면, 나는 성공한 것이다."

 

나는 그 한 사람이 되었다. 아마 이 책을 펼치는 많은 독자들도 그렇게 될 것 같다.

 

5. 이런 뿐께 추천해요

 두꺼운 고전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분, 번역이라는 작업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분, 혹은 무언가에 오랫동안 진심으로 헌신한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한 분. 이 책은 그 모든 분들에게 조용하고 따뜻한 울림을 줄 것이다.

 

고전은 어렵지 않다. 다만 아직 좋은 길안내자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안내자가 되어준다. 새벽 2시에 혼자 책상 앞에 앉아 도스토옙스키와 씨름했던 한 사람의 10 년이, 우리에게는 고전으로 가는 가장 따뜻한 입구가 되어줄 것이다.

 


 

별점: ★★★★☆ (4/5)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읽기 전 워밍업으로, 혹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에세이로 추천합니다.